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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인종, 계급, 미술: 시선의 권력과 표현의 투쟁
미술은 누구의 시선으로 그려졌는가?
오랫동안 미술은 인류의 문화와 정신을 반영해왔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인류'라는 범주 안에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술의 역사 속에서 인종과 계급은 단지 주제를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라, 누가 미술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기준이었다. 백인 유럽 남성 중심의 시선은 오랜 세월 동안 미술의 주도적 흐름을 장악했고, 그 속에서 타자의 시선은 왜곡되거나 배제되었다. 흑인, 여성, 하층계급, 식민지 출신 예술가들은 오랫동안 전시장에서 지워진 존재였고, 그들의 삶과 경험은 미적 가치나 표현의 대상으로조차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인종과 계급은 단지 사회적 분류가 아니라, 예술이 어떤 세계를 묘사하고 어떤 목소리를 들려주는지를 결정짓는 시각적 권력의 구조다. 백인 중심의 미술관과 갤러리, 귀족의 초상화와 종교화가 미술의 정전으로 여겨졌던 시기에, 피지배자와 빈민, 흑인과 이주민들은 대상화의 위치에 머물렀다. 이들은 주체가 아니라 타자의 이미지로 포획되었고, 그 시선은 대개 왜곡되거나 비인간화된 방식으로 재현되었다. 또한 계급적 조건 역시 예술의 생산과 수용 모두에서 결정적이었다. 귀족과 부르주아의 후원을 받지 못한 예술가들은 표현의 기회를 얻기 어려웠고, 하층 계급의 삶은 예술로서의 ‘격’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흑인 해방운동, 노동운동 등 사회운동의 확산과 함께 예술 역시 이 권력의 구조를 비판하고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인종과 계급을 주제로 다루는 미술이 점차 부상하면서, 억눌린 목소리들이 미술을 통해 발화되기 시작했고, 기존 미술사의 경계를 흔들며 새로운 미학적, 정치적 해석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인종과 계급의 시각적 재현 문제를 중심으로, 미술이 어떻게 권력을 반영하고 도전하며 변모해 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백인의 시선, 타자의 이미지 – 인종적 재현의 왜곡과 도전
오랜 시간 동안 미술은 서구 백인 남성의 시선을 기준으로 세계를 재현해왔다. 고전 회화에서 동양인이나 흑인은 이국적 오리엔탈리즘이나 식민주의적 시각으로 묘사되었으며, 그 존재는 주체가 아닌 대상화된 풍경이나 장식으로 기능했다. 유럽 제국주의가 한창이던 18세기와 19세기, 흑인 인물은 백인 귀족의 초상 속 ‘하인’이나 ‘노예’로 등장했고, 동양인은 이국적 쾌락의 기호로 전락했다. 예를 들어, 앵그르의 「대공녀」나 들라크루아의 「알제의 여인들」은 이러한 시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이 회화들은 단지 미적 재현을 넘어서, 권력 관계를 내면화시킨 시각적 질서를 형성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흑인 민권운동과 포스트콜로니얼 담론의 부상은 이러한 시선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예술의 흐름을 낳았다. 흑인 예술가들은 더 이상 타인의 시선 속 이미지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기 정체성과 경험을 주체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장미셸 바스키아는 그래피티와 원시적 형태의 회화를 통해 흑인 정체성과 사회적 억압을 강하게 표출했고, 캐리 제임스 마셜은 흑인의 일상과 역사적 경험을 정교하고 서사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며 ‘흑인의 존재를 화폭에 담는 일’ 그 자체가 정치적 실천임을 증명했다.
이러한 미술은 단지 인종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종적 구조를 재현하고 해체하며, 예술 내부의 권력 메커니즘을 가시화하는 비판적 실천이다. 백인의 시선을 전복하고, 타자에게 말할 수 있는 언어와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미술은 점점 더 다층적이고 정치적인 공간으로 확장되어 간다.
계급의 시각화 – 누가 예술의 주체가 되는가?
계급은 예술의 세계에서 흔히 간과되지만, 사실상 가장 강력하게 표현과 수용을 결정짓는 요인 중 하나다. 예술가의 생계 자체가 후원자에 의존했던 시기, 노동자 계층이나 빈민층의 삶은 미술의 주제가 되기 어려웠다. 르네상스 시기 회화는 주로 귀족, 성직자, 부르주아의 초상이나 이상화된 종교적 서사를 다루었고, 평범한 민중의 삶은 회화에서 종종 배제되거나, 익명성과 상징으로만 존재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급적 분리는 19세기 후반부터 점차 흔들리기 시작한다.
구스타브 쿠르베는 〈돌 깨는 사람들〉에서 농민 노동자의 거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며, 예술의 ‘주제’가 귀족만이 아님을 주장했다. 그는 회화를 통해 사회적 현실을 드러내며, 미술이 정치적 발언이 될 수 있음을 선언했다. 이어진 사회주의 미술과 멕시코 벽화 운동은 노동자, 농민, 혁명가들을 전면에 배치하며, 계급적 시선을 가진 미술의 정당성을 확대했다.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는 멕시코 민중의 역사와 계급 투쟁을 장엄하게 그려내며, 미술이 민중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현대에 들어서도 계급은 여전히 미술의 경계를 형성한다. 미술대학, 갤러리, 미술관, 경매 시스템 등 예술의 생산과 유통을 결정짓는 구조는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접근성을 전제로 하며, 빈곤층 청년이 예술가로 성장하는 경로는 여전히 협소하다. 계급적 제약은 예술의 주제를 넘어, 작가의 존재 조건 자체를 제한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예술이 주목받고 있으며, 예술가들은 지역 공동체와 협업하며 계급적 현실을 직접 개입하고 형상화하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포용적 미술의 가능성과 과제 – 제도, 표현, 시선의 재편
최근 수십 년 동안 미술계는 인종과 계급 문제를 제도적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확대해 왔다. 미술관과 갤러리들은 비서구 작가, 여성 예술가, 소수자 예술가들의 전시 기회를 늘리고, 인종적 다양성을 반영한 큐레이션을 시도하고 있다.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는 흑인, 여성, 이민자 작가들의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주며, 국제 미술계가 점차 ‘포용적 예술’을 새로운 기준으로 삼고 있음을 입증했다.
하지만 그 변화가 단지 ‘대표성’에만 머무를 때, 오히려 또 다른 차별 구조가 형성될 수도 있다. 소수자 예술가들이 상업성과 유행에 따라 전시되고 소비될 경우, 그들의 경험과 목소리는 여전히 제도적 틀 안에서 조작되거나 이용될 위험이 있다. 중요한 것은 표면적인 다양성을 넘어서, 미술의 생산과 유통, 교육 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것이다. 이는 인종적, 계급적 차이를 단지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반영한 방식으로 예술의 형식과 담론, 공간을 다시 구성하는 일이다.
또한 디지털 시대의 도래는 미술의 민주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SNS, 온라인 전시, NFT와 같은 기술은 기존의 물리적, 계급적 제약을 어느 정도 완화하며, 다양한 배경의 예술가들에게 창작과 유통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디지털 격차와 자본 집중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계급 문제 역시 함께 나타나고 있기에, 기술이 자동으로 평등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결국 포용적 미술은 끊임없는 구조적 비판과 자기반성을 동반해야 하며, 그 속에서 인종과 계급의 시선이 어떻게 표현되고 해석되는가를 지속적으로 되묻는 작업이 필요하다.
미술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인종과 계급은 단지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예술의 근본을 구성하는 구조적 요소다. 미술은 오랫동안 백인 중심, 상류계층 중심의 시선으로 세계를 묘사해 왔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존재들은 침묵을 강요받거나 왜곡된 이미지로 전시되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도 표현의 욕망은 끊임없이 솟아났고, 억눌린 존재들은 언어가 부재한 자리를 새로운 형식과 감각으로 채워나갔다. 현대 미술은 이제 더 이상 단일한 정전 속에 머무르지 않으며, 수많은 목소리들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미술은 이제 단지 아름다움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과 저항, 침묵과 목소리, 주체성과 타자성의 경계에서 살아 움직이는 정치적, 윤리적 실천이 된다. 인종과 계급을 다루는 미술은 우리로 하여금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누가 보이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고, 예술이 가진 시선의 힘을 반성하게 만든다. 또한 그것은 예술 내부의 질서를 전복하고, 표현의 장벽을 허무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으로 작용한다.
포용적 미술, 비판적 미술, 실천적 미술은 결국 예술이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귀결된다. 인종과 계급의 문제는 단지 주제나 배경이 아니라, 표현의 방식 그 자체이며, 예술의 윤리와 방향을 결정짓는 기준이 된다. 이제 우리는 미술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을 통해 어떤 사회를 상상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미술을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바라보는 일이며, 우리가 예술을 통해 더 평등하고 다층적인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의 실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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