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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치적 프로파간다로서의 미술: 시각예술은 어떻게 권력을 섬기거나 저항했는가
미술, 선전의 도구인가 표현의 자유인가?
미술은 본질적으로 감성과 사유의 표현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사회적 맥락 안에 놓인 실천이었다. 특히 정치적 격변의 시기마다 시각예술은 특정한 이념, 권력, 체제의 정당성을 시각적으로 설득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를 우리는 ‘프로파간다 미술’ 혹은 ‘정치적 미술’이라 부른다. 미술이 단지 미적 판단의 영역을 넘어, 사상과 이념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시각성과 상징성 때문이다. 말보다 빠르고, 논리보다 감각에 직결되는 이미지의 힘은 체제의 욕망을 은폐하거나 과장하고, 때로는 대중을 이념적으로 무장시키는 매개체로 기능했다.
고대 로마의 개선문 부조나 중세 성화, 바로크 시대 궁정화처럼, 권력을 찬미하고 체제를 정당화하는 미술은 오랜 전통을 지닌다. 근대 이후에는 국가주의, 제국주의, 전체주의 체제들이 더욱 체계적으로 미술을 선전 도구로 활용했다. 제1·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 포스터, 소비에트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나치의 아리아 인종 미화, 중국의 문화대혁명 포스터 등은 그 대표적 예이다. 반면, 이러한 체제의 미학에 저항하며 새로운 시각언어로 비판을 가한 미술도 함께 발전해 왔다.
이 글에서는 미술이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기능한 역사적 사례들과 그 시각적 전략을 분석하고, 현대 미술에서의 저항적 시도까지 함께 살펴본다. 권력과 이미지, 이념과 시각성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탐색하며, 우리는 ‘미술이 과연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권력의 미학 – 역사 속 프로파간다 미술의 전통
정치적 목적을 위한 미술의 활용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 왔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부조나 로마 제국의 개선문 부조는 군사적 승리와 지배자의 신격화를 시각적으로 기록하는 수단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교황청과 군주들이 자신들의 권위와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 같은 거장들에게 대형 프레스코화를 의뢰했다. 이런 작품들은 예술로 포장된 권력의 얼굴이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시각전략은 대중 선전이라는 새로운 방향으로 정립되었다. 프랑스 혁명기에는 민중의 힘을 강조한 회화들이 대거 등장했지만, 곧 나폴레옹은 이를 역이용해 자신을 황제로 정당화하는 프로파간다로 삼았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은 이중적인 정치성의 상징이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전체주의 체제들이 미술을 더욱 체계적으로 활용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노동자와 농민의 이상화를 통해 공산주의의 미래를 시각화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낙관주의, 집단주의, 지도자 숭배를 하나의 양식으로 정형화했다.
나치 독일에서는 현대미술을 ‘퇴폐적’이라 규정하고, 아리아 민족의 이상을 반영한 고전주의적 형식을 부활시켰다. 전시회, 공공 조형물, 회화와 조각 모두가 이념의 수단이 되었다. 파시즘 이탈리아나 스페인 프랑코 체제에서도 유사한 전략이 사용되었고, 중국의 문화대혁명 포스터나 북한의 선전화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미술은 단지 체제의 도구가 아니라, 체제를 미적으로 구현하는 설계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미지의 조작과 대중 감성의 동원 – 프로파간다 미술의 전략
프로파간다 미술은 단순히 권력을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매우 정교한 심리적 조작과 시각적 전략을 활용한다. 이미지의 구도, 색상, 크기, 상징 요소는 모두 정치적 메시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전쟁 포스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적의 비인간화’와 ‘자국의 영웅화’가 있다. 20세기 초 미국과 영국의 전쟁 포스터에서는 병사가 근엄하고 고결한 모습으로 묘사되는 반면, 적국은 괴물처럼 형상화되어 감정적 반응을 유도한다.
색상은 감정의 환기 도구로 자주 사용된다. 붉은색은 혁명과 투쟁, 흰색은 순수, 파랑은 국가적 존엄을 상징하는 방식으로 조합되며, 이러한 시각적 코드들은 대중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각인시킨다. 또한 반복된 이미지의 사용, 대형 인물화, 전시회와 기념행사의 활용 등은 메시지를 물리적 공간에 각인시키는 방법이다. 이는 마치 건축과 조각이 도시를 ‘이념의 풍경’으로 변형시키는 과정과 유사하다.
더불어 이념적 메시지는 종종 도덕적 가치와 결합되어 표현된다. 노동자의 미소, 어머니의 헌신, 청년의 투쟁심은 ‘옳고 정의로운 것’이라는 정서적 확신을 유도하며, 반대의견은 ‘타락’ 혹은 ‘반국가’로 낙인찍힌다. 이는 비판적 사고를 봉쇄하고, 대중을 하나의 방향으로 조직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정치 미술은 단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못 보게 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저항과 해체 – 현대 미술에서의 반(反)프로파간다 시도
정치적 미술이 항상 권력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20세기 후반 이후에는 그러한 체제 선전에 대한 비판적 시도가 예술을 통해 강하게 전개되었다. 다다이즘과 개념미술, 사회참여형 미술 등은 모두 기존 질서와 시각 언어의 해체를 추구했다. 특히 게릴라 걸스(Guerrilla Girls)와 같은 예술 단체는 미술계 내부의 성차별과 정치적 기만을 고발하는 포스터 작업을 통해 ‘대항적 시각 언어’를 구축했다.
또한 마르셀 브로타르스나 한스 하케와 같은 작가들은 미술관이라는 제도 자체가 어떻게 권력과 자본, 국가 이데올로기에 종속되는지를 작품으로 드러냈다. 하케의 작업은 기업 스폰서와 전시 기획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폭로하며 ‘미술의 중립성’이라는 환상을 깨뜨렸다. 이와 같이 현대 미술은 오히려 프로파간다의 언어를 패러디하고 전복함으로써, 대중이 시각 이미지에 담긴 이념을 비판적으로 읽어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인터넷과 SNS가 발달한 오늘날에는 프로파간다의 대상이 국가나 체제만이 아니라, 자본과 미디어, 빅데이터, 알고리즘 권력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이에 따라 디지털 아트나 영상 기반 작업, 퍼포먼스, 공공 설치미술은 보다 다원화된 저항의 언어로 진화하고 있다. 과거처럼 단일한 메시지를 강요하는 대신,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관객의 참여와 사유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프로파간다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미술은 누구의 언어인가 – 시각예술과 권력의 이중성
정치적 프로파간다로서의 미술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미술은 표현의 자유를 상징하는가, 아니면 지배 이데올로기의 확산 도구인가? 미술사는 이 두 흐름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해왔다. 때로는 권력을 정당화하고, 때로는 그것을 전복하며, 미술은 사회 속에서 결코 중립적이지 않은 위치에 존재해 왔다. 특히 이미지가 감각적이며 설득력 있는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술은 여타 예술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선전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미술은 그러한 선전의 언어를 비틀고, 해체하며, 다시 구성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미술은 단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숨기는 것까지 포함하는 ‘시각의 정치’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읽는 시선 자체에 대해 비판적일 필요가 있다. 어떤 그림은 감탄을 자아내지만, 동시에 체제의 권력을 은밀히 내면화시키기도 한다. 어떤 설치작업은 산만해 보이지만, 오히려 진실을 드러내는 촉매제가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왜, 무엇을 위해 미술을 사용하는가이다. 미술이 자유의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그 시선과 맥락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비평적 시선이 병행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정치적 미술을 ‘역사의 반영’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그것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자각해야 한다. 미술은 여전히 이념의 언어일 수 있으며, 그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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