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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서의 젠더 표현: 몸, 정체성, 시선의 재구성
예술에 드러난 성별의 코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감추는가?
예술은 오랜 세월 인간의 욕망과 이상을 형상화해왔다. 그러나 그 형상화 과정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았다. 특히 미술에서 젠더는 단순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시선, 규범과 재현의 구조 속에서 복잡하게 작동해온 핵심적 요소였다. 르네상스기의 이상화된 여성 누드, 신고전주의 조각 속 남성 영웅의 근육질 신체, 그리고 모더니즘 회화에 나타난 여성 뮤즈의 반복된 이미지까지—이러한 재현들은 단지 ‘성’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당대 사회가 성별을 어떻게 인식하고 통제했는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20세기 이후 페미니즘의 등장과 함께 미술에서의 젠더 표현은 비판적 시선 속에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기존의 젠더 재현 방식은 남성 중심적 시각의 산물로 간주되었고, 그로 인해 여성, 퀴어, 논바이너리 정체성 등 주변화된 주체들이 예술 속에서 어떻게 배제되고, 또는 왜곡되어 왔는지를 고찰하는 연구들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미술은 젠더에 대한 사회적 고정관념을 드러내고 해체하며, 젠더 정체성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장으로 점차 진화해왔다.
젠더는 이제 미술에서 단순히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기준이 아닌, 사회적 맥락 안에서 구성되는 복합적이고 유동적인 정체성으로 이해된다. 이 글에서는 역사적 맥락에서 젠더가 어떻게 시각적으로 구성되어 왔는지를 검토하고, 현대 미술이 젠더의 개념을 어떻게 확장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또한 시선의 권력, 젠더 퍼포먼스, 퀴어 미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미술 속 젠더 표현의 의미를 해석해보고자 한다.
전통 미술 속 젠더 재현의 구조
고전 회화에서부터 19세기 아카데미즘에 이르기까지, 미술은 젠더를 이분법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에 익숙했다. 남성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여성은 수동적이고 대상화된 이미지로 반복적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단지 예술적 관습이라기보다는 사회 구조 속 권력 관계의 반영이었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여성 누드화들은 대체로 남성 관람자를 위한 ‘응시의 대상’으로 기획되었으며, 그 시선은 종종 여성의 욕망이나 내면과는 무관하게 구성되었다.
이러한 젠더 표현은 존 버거(John Berger)가 말한 ‘보는 방식(Ways of Seeing)’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는 여성은 스스로를 의식하며 타인의 시선을 고려한 방식으로 재현되며, 결국 스스로를 소비되는 이미지로 연출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는 ‘남성의 응시(male gaze)’ 개념으로 확장되어, 미술 속 여성 표현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 시각에 의해 구조화되었는지를 비판하는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다.
반면, 남성은 주로 역사화나 종교화에서 영웅적 인물로 재현되며, 지성과 결단력의 상징으로 그려졌다. 이는 미술이 젠더에 따라 어떤 역할과 감정, 능력을 부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결국 전통 미술에서의 젠더 표현은 단지 ‘그림 속 인물’을 넘어서, 당대 사회가 성별에 부여한 역할 기대와 규범을 시각적으로 재생산한 매개체였다.
페미니즘 미술과 재현의 전환
1970년대 이후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은 미술계에서도 강한 반향을 일으켰다. 젠더 불평등과 여성의 대상화에 맞서, 여성 작가들은 자신의 몸, 경험, 목소리를 주체적으로 재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단지 남성 중심 미술계에 진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존의 표현 방식 자체를 전복하고자 했다. 주디 시카고의 [디너 파티(The Dinner Party)], 바바라 크루거의 텍스트 기반 작업, 신디 셔먼의 자아 분열적 사진 연출 등은 모두 전통적 재현 방식에 대한 강한 도전이었다.
이러한 페미니즘 미술은 여성의 육체를 성적 대상이 아니라, 정치적·문화적 주체로 위치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특히 자전적 경험, 신체, 생식, 노동, 억압 등의 주제를 통해, ‘여성다움’이라는 개념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규범임을 폭로했다. 젠더는 타고난 생물학적 조건이 아니라, 수행되고 강요되는 문화적 코드라는 점이 이 시기 미술의 핵심적 메시지였다.
동시에, 여성 작가들은 미술사의 남성 중심 서사에서 배제된 여성 작가들을 재조명하고, 자신들의 작업을 통해 여성 예술사의 단절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미술을 젠더적 정의 속에서 다시 쓰고, 시각 문화를 젠더 감수성을 바탕으로 재구성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미술은 이때부터 젠더를 비판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비판적 실천의 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퀴어 미술과 젠더의 유동성
현대 미술은 페미니즘의 비판적 전통을 바탕으로 퀴어 이론과 교차되며, 젠더 표현의 스펙트럼을 더욱 확장하고 있다. 퀴어 미술은 이분법적 젠더 구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젠더를 유동적이고 수행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이는 주디스 버틀러가 말한 ‘젠더 수행성’ 개념을 시각적으로 실현한 작업들로 나타나며, 기존 미술의 규범과 도식을 근본적으로 해체하려는 시도를 포함한다.
데이비드 워너로비치,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케이티 래너넌 같은 작가들은 성적 소수자 정체성을 중심에 두고, 사회적 억압, 질병, 정체성 문제를 다루는 작업을 선보였다. 특히 곤잘레스-토레스의 사탕 설치 작품이나 침대 이미지 시리즈는, 겉보기에 비정치적으로 보이지만 내면에는 깊은 감정과 사회적 맥락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SNS 시대에 접어들며 퀴어 아트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더욱 다양한 시도와 확산을 이루고 있다.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드랙 퀸 등의 정체성이 예술 속에서 주체적으로 표현되며, 젠더의 고정성을 해체하는 작업들이 전 세계에서 등장하고 있다. 이는 미술이 단지 시각적 재현을 넘어서, 존재 방식 자체를 재정의하고 사회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술, 젠더의 경계를 질문하다
미술에서의 젠더 표현은 단지 남성과 여성의 재현을 넘어서, 그 이면에 놓인 권력 구조, 시선, 사회적 규범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전통 미술은 종종 젠더를 이분법적으로 구성하고 고정된 역할을 할당해왔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의 확산은 미술의 젠더 표현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전환점을 마련했다. 여성은 객체가 아닌 주체로, 성소수자는 타자의 위치가 아닌 중심적인 화자로 떠오르며, 미술은 젠더와 사회 간의 복잡한 관계를 해석하고 질문하는 공간이 되었다.
현대 미술은 이제 젠더를 생물학적 사실이 아닌, 사회적 행위로 바라본다. 젠더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수행되고 구성되는 것이며, 이러한 개념은 예술의 형식과 내용 모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페미니즘 미술은 재현의 정치학을 전면화시켰고, 퀴어 미술은 젠더 경계의 해체를 통해 새로운 예술 언어를 창출했다. 오늘날의 미술은 이러한 흐름을 바탕으로, 더욱 다층적이고 다양한 젠더 정체성을 수용하며 사회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비판적 실천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미술을 단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닌, 정체성과 권력을 재구성하는 장으로 탈바꿈시킨다. 예술은 더 이상 특정 성별의 시선을 중심으로 구성된 폐쇄적인 구조가 아니라, 다양한 주체들의 이야기가 공존하고 충돌하는 개방된 장이 되었다. 앞으로도 미술은 젠더와 정체성의 문제를 다층적으로 반영하며, 예술이 사회와 만나는 접점에서 비판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미술 속 젠더 표현은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있으며, 이는 단지 예술적 경향이 아니라, 시대적 요구이자 문화적 전환을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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